시는
이병률
나비를 그리는 데 나비가 왔다
시를 쓰는데 시가 오지 않는 것과 다르다
책상으로 누군가 와서
대신 몇줄을 남기고 갔으면 할 때도
창가에 두고 잤다
종이를 두고 잤다
얼룩이거나
하다못해 재라도 이어 붙였으면 할 때도 있지만
밤새 비가 와서 종이가 젖고
준비들이 흩어져 뒤집혀 있었다.
말할 수 없는 저녁에
가만가만 목메는 저녁 한가운데다
나비가 두 장으로 펄럭거리며 날다가
삶에 문득 관련하여서
담벼락의 장미향을 물러나게 하면
그것으로도 시는 아닌가
그렇다면 시는 또 미안해서 오는 것인가
오더라도 한줄은 말고
두세 줄로 오게나
섭섭하지 않게 와
말들을 잊으면서 와
아무렇지 않은 듯
일체의 힘을 버리고 와서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사이
새로는 말고 시로 앉게나
그럴 수 없겠다는 듯
그렇게는 안 되겠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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