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공동체.

시/좋아하는 2015. 1. 12. 20:03 |

양파공동체 

                                                                                                                                          손미 

  

  그러니 이제 열쇠를 다오. 조금만 견디면 그곳에 도착한다. 마중 나오는 싹을 얇게 저며  얼굴에 쌓고, 그 아래 열쇠를 숨겨두길 바란다.

  부화하는 열쇠에게 비밀을 말하는 건 올바른가?

  

  이제 들여보내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고 기도했다. 그곳에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러떨어진 양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 방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문을 열면 미로들.

 오랫동안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때때로 쪼개고 열어 흰 방에 내리는 조용한 비를 지켜보았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추는 건 올바른가. 꽉꽉 찬 보따리를 양 손에 쥐고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내 집.

 

  작아지는 양파를 발로 차며 속으로, 속으로만 가는 것은 올바른가.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은 올바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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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시/좋아하는 2015. 1. 12. 19:45 |

유독

 

                                                                                                                                                 황인찬

 

아카시아 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건 네 무덤 냄새다 누군가 말하자 모두 웃었고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어.

 

다른 애들을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무덤 냄새란 대체 어떤 냄새일까?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고

흰 꽃잎은 조명을 받아 어지러웠지 어두움과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는 계속 웃었어.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함께 웃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어 냄새를 맡다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기에 우린 이렇게 웃기만 할까?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맞는 사람, 그게 아마 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은 멈추지 않았다.

 

안 그러면 슬픈 일이 일어날거야. 모두 알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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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정원.

시/좋아하는 2015. 1. 12. 19:43 |

여름 정원

 

                                                                                                                                                성동혁

 

누가 내 꿈을 훼손했는지

 

하얀 붕대를 풀며 날아가는 새떼, 물을 마실 때마다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림자의 명치를 밟고 함께 주저앉는 일 함께 멸망하고픈 것들.

 

그녀가 나무를 심으러 나갔다 나무가 되었다.

 

가지 굵은 바람이 후드득 머리카락에 숨어 있던 아이들을 흔든다. 푸르게 떨어지는 아이들.

 

정적이 무성한 여름 정원. 머무른다고 착각할 법한 지름, 계절들이 간략해진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정원에 있다. 슬프고 기쁜 걸 청각이 결정하는 일이라니 차라리 눈을 감고도 슬플 수 있는 이유다.

 

정원에 고이 잠든 꿈을 누가 훼손했는지 알 수 없다. 눈이 마주친 가을이 담을 넘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걸쳐있다.

 

구름이 굵어지는 소리. 당신이 땅을 훑고 가는 소리.

 

우리는 간헐적으로 살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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